인터넷을 보다가.. 한 글을 보게 되었다. 도도로끼 히로시라는
일본인 지리학자가 우리의 삼남대로, 영남대로를 돌아보고
책을 썼다는것..
괜시리 부끄러워진다. 국도를 따라서 그거 한번 종단했다고
횡단도 하다가 말아서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내 꼴이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닌가?
내나라 땅의 길,, 우리는 그 길을 잃어버리고 있다.
아니, 길뿐이 아니라 많은것들을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 다시 목표가 생겼다. 종단과 횡단을 끝낸 후에는
영남대로, 삼남대로와 관동대로다!
그러기 위해선, 이전의 여행기들을 정리하고 다시 계획을 짜야겠다.
쉬운일은 아닐거고, 며칠만에 되는 일도 아닐거다.
다시, 소망이 생겼다.
길 위에서 길을 찾다 - 산하님의 글(하종강의 노동과 꿈 에서 퍼옴)
누가 그러더군요. 영동고속도로 타고 강릉 가는데 도대체 언제 아흔아홉구비 대관령을 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대관령 아래 터널로 씽씽 달리다 보니 고물차 끌고 털털거리며 대관령 고갯길 넘던 시절이 아득하더라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언젠가 대관령 고갯길을 돌다가 스쳐 지나갔던 팻말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건 '대관령 옛길'이었지요.
아마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 손잡고 대관령 넘을 제엔 그 길은 서울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길은 관광객들이나 되짚는 길이 되어 버렸고 왕년의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은 또 하나의 '대관령 옛길'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길이란 게 그럴 겁니다. 한때 나라의 동맥이 되었던 주요 통로일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잡초로 뒤덮인 채 버려질 수도 있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 서울에서 동래를 잇던 영남대로와 이몽룡이 마패 차고 남원 가던 삼남대로, 강릉에서 서울 올라오던 관동대로의 옛길을 걸어 본 사람이 있을까요? 언젠가 제가 만났던 일본인 유학생 도도로끼 히로시는 그 경험을 소유한 흔치 않은,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를 만나게 된 건 그가 이미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영남대로 수백리 길을 발걸음한 다음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삼남대로를 걷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의 여행방식은 특이했습니다. 매주 주말 그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갑니다. 그 출발지는 그 전 주에 그가 걸어서 이르렀던 지점이지요. 거기서 다시 도보로 출발하여 남(南)으로 남으로 옛길을 따라 내려가는 겁니다.
도대체 그 옛길을 어떻게 찾느냐 의아해하던 저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배낭 속에는 대동여지도부터 구한말 일본군이 작성한 지도, 국립 지리원 제작 몇만분의 1 지도까지 구색도 골고루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널려 있는 이정표와 편안한 신작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좁다란 시골길을 찾아 걷던 그가 뭔가를 가리킵니다. 전혀 옛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시멘트 다리였지요. 저게 뭐 대수로울 것이 있나 싶었는데 그 다리는 좀 특이한 명찰을 달고 있었습니다. ‘마방교’ (馬房橋)
“이 일대가 옛날로 치면 대로변이었어요. 마방이란 건 마굿간이 있는 주막집을 말하거든요. 그만큼 사람들 발길이 많은 곳이었다는 거지요.”
그렇듯 이름으로만 남은 옛 대로의 잔해를 따라 우리 일행은 줄기차게 걸었습니다. 대동여지도와 구한말 지도에 분명히 표기된 고갯길은 평지가 되어 있었고, 일제 시대 지도에 나타난 길은 머리 새하얀 할아버지들도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영역에 접어들어 있더군요.
도도로끼씨는 그 자욱한 세월의 안개를 뚫고 몇 번씩이나 끊어졌던 우리의 옛길을 더듬어 걸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는 경천이라는 곳에 들어섰습니다. 평범보다는 조금 더 퇴락한 시골 읍내, 그 지명을 들먹이면서 도도로끼의 눈은 빛나고 있었지요.
“여기가 춘향전에 나오는 그 경천이에요. 이몽룡이 암행어사 돼서 전라도 들어가기 직전에 이 경천에서 잤다고 하거든요. 예전엔 꽤 큰 장터였어요. 이 다음은 노성이고, 그 다음은 전라도 첫 고을 여산이죠.”
고목나무 옆에서 막걸리 추렴하던 백발 노인들에게 경천장의 과거를 물으니 불콰한 언성이 드높아집니다. 왕년에 여기는 짐 끌고 온 소들만 수백 마리 넘었다는 둥, 주막에서 하루에 막걸리 몇 말을 팔았다는 둥 신이 나서 경천장의 화려했던 옛날을 증언하더군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춘향전의 한 구절 속 지명, 한때 번성했다는, 그러나 신작로가 다른 곳으로 나 버린 후 완전히 퇴락해 버렸다는 옛 길가의 장터 마당에서 저는 한순간 당혹스러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도대체 이 동글동글한 일본인은 무엇 때문에 외국 하고도 잊혀진 길의 나그네가 되어, 그 나라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는 길을 잇기 위해,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수고를 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옛길을 답사하는 사람들이 많고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요. 하지만 한국의 옛길은 그렇지 않더라구요. 아무도 안하는 일을 해 보는 거 좋지 않아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결국 한국 사람 아무도 안하던 일에 일본 사람이 손을 댔고 저는 그의 길잡이에 속절없이 따르고 있었으니까요. 어떤 학자는 "이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자부하기엔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적다"라고 탄식을 했었습니다. 물론 그럴 만큼 경황 없고 어지러운 역사를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마는, 그만큼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우리 스스로 너무도 쉽게 잊어 버렸습니다. 지속적으로 잊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구요. 우리도 까마득히 잊은 길을 찾아 헤매며, 멀쩡한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찾았던 일본인 도도로끼 히로시의 기억은 가끔 송곳처럼 제 뇌리를 찌르곤 합니다.
여행의 말미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제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호남대로 끝나면 관동대로 가구요. 관동대로 끝나면..... 통일된 뒤에 관서대로 관북대로를 가지요. 통일되면 백두산까지 갈 수 있다. 아니 유럽까지도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는 말보다 서툰 솜씨로 뜻밖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수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 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수천년을 흘렀네 모진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 왔네........" 그날 한 기특한 일본인의 노래에 얼굴이 붉어졌던 건 단지 저무는 노을빛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연한 얼굴로 "백두산에 호랑이야 아직도 살아 있느냐 살아 있으면 한 번쯤은 어흥하고 소리쳐 봐라."고 노래할 때 저는 정말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를 몰랐으니까요. 부끄럽고, 화나고, 미안하고, 짜증나서 말입니다.
제가 그를 만난 것이 2000년이었는데, 그는 2년 뒤엔 삼남대로 답사기를 책으로 엮었었고, 뒤이어 관동대로 즉 서울에서 평해까지 이어지는 옛길까지 다 그의 걸음으로 되짚었다고 합니다. 국적을 떠나서 그의 집념과 끈기에 경외감을 표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이미 그 용도를 다하여 사람들의 발걸음으로부터 멀어져 간 길을 대동여지도 찾아가며 탐색하는 외국인 지리학도의 작업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 년이 지난 오늘, 저로 하여금 도도로끼 히로시를 떠올리게 만든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도도로끼 히로시 저리 가라 할 지경의 집념으로 사람들이 외면한 옛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지요. 이미 길이 아니게 된 길을 길이라고 우기며 다른 길로 가는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고 너는 대체 어느 길로 왔느냐면서 눈을 부라리는 희한한 옛길잡이들 말입니다.
수십 년 동안 멀쩡한 사람들에게 빨간 물을 들이부었던 공안 검사 출신이 감히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두고 ‘간첩’으로 ‘암약’해 왔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 꼬락서니, 검사쯤이나 해 먹은 사람이 증거 하나 없이 그런 폭로를 하고도 되레 큰소리를 치는 코미디, 그리고 그 작전을 두고 당 대표가 승인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빨갱이 만들기 명수 정형근 의원이 감수하는 풍경, 그리고 “아니면 말고”라고 헛기침하는 태도까지 그 옛길잡이들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더군요.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소리도 있습니다만, 그 버릇 개도 싫다 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마 동네 강아지들도 그런 버릇은 들이기 싫어할테니까요. 그 당에 있으면 그 버릇도 옮는 모양입니다. 민변 출신이라는 작자까지도 개도 피하는 그 버릇을 들인 걸 보니까 말입니다.
김용갑 의원의 동기들, 즉 잘나가는 육사 17기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국민들의 입을 아갈잡이할 때, 도도로끼 히로시가 불렀던 노래는 금지곡이었습니다. 이유는 따로 없었습니다. 그냥 맘에 들지 않는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라는 가사가 걸렸는지, 도도로끼 히로시가 불렀던 “백두산에 호랑이야 아직도 살아 있느냐”가 심기를 거슬렸는지, 그런 “감상적인 통일론이 적을 이롭게 할 소지가 있어” 그랬는지 모르나 그걸 부르면 사상이 불순한 자로 의심받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불행한 계승자들은, 스스로 불행할 뿐 아니라 남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가련하기까지 한 옛길잡이들은 아직도 그날의 살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살기로 단련된 딱지들을 표창삼아 날려 보내는 그 더러운 짓을 또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 옛길의 가장 큰 이정표, 국가보안법이 사라져야 할 이유를 그들은 몸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불편한 놈 있으면 나와 봐.” 하지만 국회에서의 그들의 망발은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의 개버릇으로 “불편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때려잡을 수 있다는 것의 반증이며, 나아가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이들을 얼마든지 ‘국가보안법이 불편한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말임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저 공안검사들...... 정형근 주성영 의원 그리고 이 땅 군부독재의 잔재 주제에 시대의 새로운 발걸음들 앞에 드러누워 버티는 김용갑 의원이 행복해 하던 시대를 한 번이라도 되돌아 본다면, 그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는 능히 짐작이 갑니다.
도도로끼 히로시의 작업에 표하는 경의만큼이나 사이비 옛길잡이들의 개도 안물어갈 버릇과 아집에 경멸을 표합니다. 아주 충만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