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리포트2009. 4. 2. 00:45
얼마 전 서경식교수의 책이 을 읽은 적이 있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였는데.... 책 내용 자체는 평화박물관에서 서경식 교수가 강연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지만...제목이 계속 고민스럽게 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접하고 난 후 나눔의 집에 왔다갔다 하면서, 수요시위에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다... 과연 고통의 기억과 연대는 가능한가... . 이 제목을 곱씹으며계속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전에 읽은 또다른 책인,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에서 이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었는데,  동정과 연민이다.
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 -218쪽-

타인을 연민하는 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은 가장 서글픈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따뜻해져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따뜻함을, 내가 이해한 모든 것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내가 이해한 타인의 슬픔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건 자기 연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연민하고, 타인의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을 연민하며, 나와 연민과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 사이에 있는 어떤 벽을 슬퍼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같은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만, 우리가 서로 똑같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서로에게 보여줄 순 없다. 우린 우리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을 상상한다. 같은 것이지만, 우린 같다고 상상해야 타인의 슬픔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모두 다르다. 난 이렇게 슬픈데, 넌 왜 저렇게 슬픈가? 내 안에 너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 있어도 넌 왜 모르고 어깨를 스쳐가는가? 내가 상상한 슬픔이 너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슬픔인가? 나는 지금 너를 연민하고 있다. – 218-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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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지난번 피스로드에 참가하고 한 후, 다음 하이픈 기자단에서 활동중인 친구가 있다. 다른 친구들과 기사를 썼는데, 모금이 얼마 안남았더군. 혹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 중 관심있으신 분들은.. 클릭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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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료실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