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리포트2008. 2. 25. 09:20
클럽 w.h.y 에 올렸던 글....

제가 처음 피스로드에 참가한게 2005년 여름이니깐.
나눔의 집을 안 지도 벌써 4년째가 되가고 있군요.

피스로드는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계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교 때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들었고,
또 피스로드에 참가하기 바로 전에 광복군 활동을 했던 사람의 행적을 뒤쫓는 행사에 참가를 했었 지요.
(졸업논문도 -논문이란 이름을 붙이기는 참 부끄럽습니다만... 거의 짜깁기였으니까요...- 당시 일제와  맞섰던 조선의용군에 대해서 썼으니까요....)

국사학과를 들어가게 된 계기도 고등학교때 교과서를 보면서 "~~~~ 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부딪혀 ~~~ 했다"란 서술을 보면서였습니다.

"쪽바리"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본놈들"에 대한 편견은 많이 심했고,
애국과 민족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면에서 보려고 합니다만....)

피스로드를 하고,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할머니들을 만나고, 어느새 눈에 익어 버리면서... 일본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물론 일본이란 국가가 가고 있는 방향은 또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일본안에서,
또 한국안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졸업한 뒤에도 공부한답시고 이렇게 탱자탱자 놀고 있죠....

처음 수요시위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3.1절이었는지 8.15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꽤 사람들이 많이 왔었습니다. 아는 선배가 '행사 하는데 좀 도와주지 않을래?'라고 물어서 행사하는 무대 옆에서 기자들을 막는사람으로 참가를 했었어요. 할머니들 바로 코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행사가 진행중인데도 촬영으로 막고 있는 사람들을 아무말 없이 막고 있었습니다.

잘못해서 한 사진기자 아저씨랑 싸울뻔도 했었죠. 행사 도중에한 중학생 아이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머니들이 참혹한 고통을 당하셨다며 발언을 하는데 막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역사를 배운다는 사람이 이런 것도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죠. (사실 역사를 공부한다고 해도 모두다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건 아닙니다만 여하튼 당시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수요시위를 마치고 엉엉 울면서 집에 갔습니다. (지금도 가끔 나름 감동적인 글을 읽거나 하면 버스안에서 질질 짜기도 합니다. 왠 지지리 궁상인지...^^)

그렇게 가슴아파하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다시한번 가야지 가야지 생각은 했지만 한 수업에 가느라,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뭐 백만가지 핑계를 다 댈 수 있겠죠. ) 내 생활에서 이 문제는 잊혀져 갔습니다.
결국 내 문제가 아니었던거죠.

그렇게 또 몇년 지내다가 피스로드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피스로드에 참가한것도 장준하기념사업회라는 단체에서 엠티(엠티라니...)로 나눔의 집에 가게 되고, 안국장님의 '일본학생들은 많이 오는데 한국학생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레파토리에 낚여서, '민족적'분노로 참가하게 되었죠.

이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려는 '이상한'일본 사람들과 만나면서, 피스로드 마지막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대답으로 수요시위를 나가면서, 뭐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피스로드 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결국 주저리 주저리가 되어 버렸네요..
요즘도 수요시위를 나가다 보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오만해진 것인지,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처음에 내가 흘렸던 눈물은 무엇인가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피번 피스로드때도 그 눈물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서 시작해야 겠죠....
아침나절부터 주저리 주저리 였습니다. ^^


몇번째의 피스로드를 보낸 후에도 그 눈물의 의미는, 아직 잘 모르겠다.

Posted by 자료실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