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 오토딕스(otto dix) , 전쟁트립티콘
-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평화주의자인가? 반전시위에 나갔던 우리는 이번 전쟁에 반대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전쟁에 반대한 것일까? 모르겠다. 우리는 왜 이 전쟁에 반대했을까? 그것이 '전쟁'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 전쟁이 '부당'하기 때문에? 모르겠다. 아직도 우리는 정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전쟁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믿는것일까? 역시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직 평화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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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멜로디는 바로 제 2차 세계대전의 주제곡 이라 불리며 당시 모든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 <릴리마를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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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마를렌>이 2차대전의 주제곡이었다면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노래는<바람만이 아는 대답 belowng in the wind>이었다. 밥딜런의 노래는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라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죽음이 더 있어야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우리는 사람들이 지르는 비며을 들을 수 있나?"그리고 "보고도 못본척하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하나?" 이 물음들에 대한 그의 답변을 누군가 우리말로 이렇게 옮겼다. "오, 내친구여,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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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은 군부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어야야 했으나 적어도 내게는 역효과를 냈다. 그것울 보고 군부독재가 아니라 그냥 세상이 싫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잔혹함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나, 그 한도를 넘어서는 압도한 잔혹함은 인간을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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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의 영혼은 상처받기 쉬운 것이다. 끔찍한 감각의 폭력에 상처받지않는 무감한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영혼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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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완벅한 폭발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한 인간이 사방에 흩어진 살점으로, 산산이 흩뿌려진 핏자국으로 해체되는 모습을 떠올렸을까? CNN이 보여주는 화면 속 이라크군의 전차는 하나같이 불을 뿌므며 타오르고 있다. 거기에도 사람이 타고 있었을 터. 용광로처럼 끓는 쇳덩이 속에서 사람이 까맣게 타죽어 간다는 사실이 왜 그들을 그토록 기쁘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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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화력으로 겁을 줌으로써 적의 저항력을 일거에 무력화해 조기에 전쟁을 끝내면 피해를 줄일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화력시위가 초래할 오폭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간단히 대꾸해 버렸다."어느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 모든 해결책에 따르기 마련인 그 불완전성이 지금까지 민간인 2천여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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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할자 버크에 따르면,만약 우리가 그런 상황속에서도 살아남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그 광포한 폭풍우도 멋진 장관으로 나타나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즐길 수 있게된다. 안전한 곳에서 바라본다면, 충격과 공포를 주는 거대한 자연의 힘에서 외려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숭고의 효과를 '즐거운 공포(delightful horror)'라는 모순된 감정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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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공할 파괴력의 시위를 우리가 영화처럼 감상할 수 있는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 참극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미디어는 전쟁의 미래주위를 신나는 활극으로 묘사하면서 그 참상을 우리 영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완화해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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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것의 가치는 그것을 팔아먹는 자들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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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개혁세력은 이 미신에 힘없이 굴복했다. 왜그랬을까? 그들이 내세운 공식 이유는 "북핵 문제의 평화 해결을 위해서"다. 이들에게 '남의 피를 대가로 우리의 평화를 사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말해야 소용없다. 그런 윤리적 어법은 도덕을 모르는 국가이성들을 조금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저 상식적으로 따져보자. 수십만의 전투병력을 파견한 미국이라는 나라에게, 수백명의 공병대가 군사적으로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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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저들의 휴머니즘이다. .... 그나마 알리가 이라크 어린이 전체를 대포할 수 있는 것은 폭격을 받을때 까지다. 그후에 그가 받은 그 알량하게 극진한 대접만은 모든 이라크 어린이의 것이 아니라 알리 혼자만의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휴머니즘을 증언할 모델은 여럿일 필요가 없다. 사진은 한장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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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군 관계자는 "국방부가 공습의 '부차적 피해'를 조사하면 그 결과는 끝이 없을 것"이라는 말로 정장화 했다. 그들에게 무고한 이들의 죽음은 '브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 사이 '이라크 보디카운트'라는 한 독립인터넷 사이트는 미국 정부가 포기해버린 바로 그 일을 대싢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4월27일 현재,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2,029명, 최대 2,488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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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어느 편에 있을 까? 침략당한 독재자오 침략하는 제국주읭자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이라크 민중의 해방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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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군대를 명분없는 침략전쟁에 용병으로 내보낸 사회의 가장 막강한 논증도 '국익'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그 시각의 냉혹함은 외려 미덕으로 상찬되고, 전쟁을 논하는 데에 '이해관계'이외의 윤리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바보짓이나 전근대적은 낭만주의로 폄하된다. 오늘날의 합리주의는 이렇게 비합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국가이성은 도덕을 모른다.' 도덕을 모르는 이성. 하긴 도덕을 모르는 게 어디 구가이성뿐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아마 도덕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구가의 이서은 자연스레 도덕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이상향은 제 2차세게대전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실현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