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리포트2009. 3. 12. 01:39
피스로드 참가자, 스탭 여러분, 잘지내고 계세요? 진행보조스탭을 맡았던 김상규입니다.
참가자분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보니 스탭에게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조금 덧붙여서 메일 써요.

스로드가 마친지 이제 거의 2주가 다 지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다시 학교에 돌아가셨을 테고, 어떤 분들은 직장에, 아니면 집에서, 아마도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셨을테지요. 무엇보다 다행이라고 생각 되는건, 크게 아픈사람 없이, 사고 없이 행사가 끝난 것이에요. 일주일동안 시끌벅적하던 나눔의 집이 피스로드가 끝나니 조용합니다. 다른 행사때도 그렇지만 일주일 내내 북적여서 그런지 더 조용한 기분이 드네요. 지난번 오키나와 피스로드는 거의 스탭 연수식이라서, 실제로 참가자들을 새로 모집하고 한 것은 거의 1년만입니다.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마지막 날 많이 친해져있는 모습에 안심했어요.

이번 피스로드는 어떠셨는지요,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고, 수요시위를 가고, 시민단체를 방문하고, 밤마다 토론했던 것은 좋은 기억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역시 그랬으니까요.


제 이야기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나눔의 집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저도 지난 2005년 여름에 피스로드에 참가를 하면서 부터입니다. 벌써 3년째가 되어가고 있네요. 저에게 피스로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계기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역사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대학교 때는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었고, 또 피스로드에 참가하기 바로 전에 광복군 활동을 했던 사람의 행적을 뒤쫓는 행사에 참가를 했었지요. 졸업논문도 (논문이란 이름을 붙이기는 참 부끄럽습니다만... 거의 짜깁기였으니까요...) 당시 중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조선의용군에 대해서 썼으니까요.... 사실 국사학과를 들어가게 된 계기도 고등학교때 교과서를 보면서 "~~~~ 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부딪혀 ~~~ 했다"란 서술을 보면서 너무 답답해서 였습니다."쪽바리"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본놈들"에 대한 편견은 많이 심했고,애국과 민족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만...)

그러다가 피스로드란 행사를 알게 되고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고, 어느새 눈에 익어 버리면서... 일본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물론 일본이란 국가가 가고 있는 방향은 또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일본 안에서, 또 한국 안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더 공부한답시고 이러고 있습니다.

 처음 수요시위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3.1절이었는지 8.15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꽤 사람들이 많이 왔었습니다. 아는 선배가 '행사 하는데 좀 도와주지 않을래?'라고 물어서 행사하는 무대 옆에서 기자들을 막는 사람으로 참가를 했었어요. 할머니들 바로 코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행사가 진행 중인데도 촬영으로 막고 있는 사람들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잘못해서 한 사진기자 아저씨랑 싸울 뻔도 했었죠.

그러던 중 한 중학생 아이가 한 말에 확 부끄러워졌어요. 그 아이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머니들이 참혹한 고통을 당하셨다며 발언을 했었는데, 그때부터 막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역사를 배운다는 사람이 이런 것도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죠. (사실 역사를 공부한다고 해도 모두다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건 아닙니다만 여하튼 당시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수요시위를 마치고 엉엉 울면서 집에 갔습니다.

그렇게 가슴아파하면서 집에 왔습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수요시위에 생각은 했지만 수업에 바빠서,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내 생활에서 이 문제는 잊혀 갔습니다. 결국 내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그렇게 또 몇 년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나눔의 집에 가게 되고, 피스로드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피스로드에 참가한 것도 나눔의집 국장님의 '일본학생들은 많이 오는데 한국학생들은 거의 오지 않는다'라는 말에 ‘민족적’분노로 참가하게 되었죠.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 하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침 수요일에 수업이 없으니 수요시위나 나가보자’ 였지요. 그러다 보니 할머니들과도 익숙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 피스로드의 스탭을 하면서, 결국에는 나눔의 집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네요.

피스로드 때 모두들 흘렸던 눈물도 그렇지만 요즘도 수요시위를 나가다 보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오만해진 것인지, 지금은 그리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다처음에 내가 흘렸던 눈물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피스로드 마지막날 일부러 ‘믿지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 것도 이전에 제가 펑펑 흘렸던 눈물이 생각나서였어요.... 뭐 그렇습니다.



일주일간 느꼈던 고민의 크기나 양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고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고민을 푸는 것도 힘들 거고, 아마 한참동안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겁니다. 저마다 그런 고민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스탭으로 있었던 사람들이나 이번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역사적 사실, 혹은 할머니들과의 관계 정도만 다르지 그 고민을 하는데 는 비슷해요. 그래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아마 일상으로 돌아가서 많이 바쁘실 겁니다. 이번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 다시 만나기도 어려운 일일 거에요. 사실 나눔의 집이 교통편이 그리 좋지도 않고요. 그렇지만... 다시 한번 여러분들을 나눔의 집에서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다시 복귀했지만 이전에 서태지가 은퇴하면서 한 이야기가 있어요. “END가 아닌 AND” 라는 말이에요. 이번 피스로드에 참가하신 분들께도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2009년 봄 피스로드는 끝났지만 각자의 피스로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09.3.4 잠설치는 새벽 김상규 -

피스로드를 끝내고 참가자들에게 보냈던 편지. 이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Posted by 자료실 고양이